[KEC 임금압류 일지 2. – 이상혁 조합원] 

 24년 다닌 회사가 내민 ‘301억 원 손배소장’

– 청춘 바쳐 일한 회사에게 ‘퇴사용’ 손배소장 받았습니다

 

손잡고 주 : 본 글은 30억 원의 손해배상을 갚기 위해 매달 회사로부터 임금이 압류되고 있는 전국금속노동조합 구미지부 KEC지회 소속 조합원들의 ‘임금압류 기록’입니다. 조합원 가운데 44명의 당사자들은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인 9월 20일, 법원 조정 명령에 따라 회사가 청구한 손해배상액 301억 원 중 30억 원을 3년 동안 임금에서 갚아야 합니다. 파업을 했기 때문입니다. 노동3권이 헌법에 보장된 나라에서, 회사의 노조파괴와 부당노동행위에 맞선 노동자가 겪어야 하는 모순된 현실을 기록하고 ‘노조 할 권리’의 현주소를 알리기 위해 해당 조합원들이 용기 내어 노동자 손배소 당사자의 임금압류 일지를 매달 <오마이뉴스> 지면을 통해서도 공개합니다(기사링크 : http://omn.kr/ogfr 24년 다닌 회사가 내민 ‘301억 원 손배소장’).

 

나는 24년동안 KEC라는 반도체회사에 근무했다. 회사는 2010년 파업에 참여한 내게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내가 참가한 2010년 파업은 회사의 정리해고 때문에 시작됐다. 

회사는 수백 명의 용역을 경비라는 이름으로 채용했다. 이 용역은 남녀 구분 없이 조합원들에게 폭력을 저질렀다. 회사는 노조가 쟁의하는 동안 신규채용으로 생산을 계속했다. 페이퍼 컴퍼니 설립과 내부거래를 통한 부당 이득 취득 등을 통해 경영상 불법을 저질렀다는 의혹도 있다. 노동자들이 이런 문제를 지적하자 고소가 이어졌다. 그도 모자라 회사는 301억 원을 배상하라고 민사 소송을 걸었다. 죽을 때까지 공장에 다녀도 벌 수 없는 돈이다. 

억울했다. 파업도 점거도 이유가 있었다. 사실상 회사가 대화를 거부하면 노동조합도 조합원도 선택지가 많지 않다. 무노동 무임금 원칙에 따라 우리는 월급도 포기하고 파업했다. 그런데 회사는 파업으로 본 손해까지 노조에 배상하라며 모든 책임을 노동자 개개인에게 묻는다. 

 2010년 KEC 불법용역투입, 구조고도화 반대 파업 현장

▲  2010년 KEC 불법용역투입, 구조고도화 반대 파업 현장

 

파업도 일상도 ‘전쟁’이 됐다

2010년 6월 경고파업은 매년 그래왔듯이 하루 이틀이면 끝이 날 줄 알았다. 회사는 파업을 해야 우리와 교섭했다. 그런데 2010년 파업은 달랐다. 경고성 파업에 이어 전면 파업이 이어졌다. 회사는 대화를 끝까지 거부했다. 대신 용역을 투입하고, 직장폐쇄를 단행했고, 우리의 파업은 길어졌다. 그래도 나와 동료들만 흔들리지 않으면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둘 회사로 복귀하고, 퇴사한 인원이 늘었다. 지도부는 마지막 선택으로 공장점거를 준비했다. 

그때만 해도 파업이 전쟁이 되어 버릴 줄 몰랐다. 단지 총, 칼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어느 전쟁보다 살벌했다. 제대로 된 교섭은 열릴 줄을 몰랐다. 끝을 알 수 없으니, 생계도 흔들렸다. 전쟁같은 상황은 가족에게도 이어졌다. 

나는 다행히 아내의 지지를 얻어 버틸 수 있었다. 아내는 가족대책위에서 활동했다. 공장 안에 음식물 넣어주기 위해 회사 출입문에서 대치하다 실신해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아내는 당시 5살, 3살 난 두 아이를 데리고 회사의 ‘불법’과 파업 상황을 알리려고 구미와 서울을 오갔다. 점거 기간 중 집에 일이 생겼을 때도 아내 덕에 이탈하지 않고 점거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점거가 끝난 뒤 정말 가족에게 미안한 일이 벌어졌다.

 
 KEC지회의 2010년 점거파업 당시 조합원 가족들이 '가족대책위원회'를 꾸려 국회, 언론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점거 당시 폭력진압에 대한 우려와 공장 내부의 열악한 상황을 알리는데 적극 압장섰다. 사진의 흰 색 모자를 쓴 사람은 이상혁 조합원의 아내다.
▲  KEC지회의 2010년 점거파업 당시 조합원 가족들이 ‘가족대책위원회’를 꾸려 국회, 언론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점거 당시 폭력진압에 대한 우려와 공장 내부의 열악한 상황을 알리는데 적극 압장섰다. 사진의 흰 색 모자를 쓴 사람은 이상혁 조합원의 아내다.
 

점거가 끝나고 2011년,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파업으로 인한 여파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회사는 공장을 점거한 조합원들 때문에 시설 파괴와 제품 손괴, 제조업 중단으로 인한 손해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점거기간에 공장에 있던 사람들은 회사가 손해가 났다고 주장하는 모든 행위를 직접 저지른 죄인이 됐다. 그 결과가 나를 포함해 공장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조합원 88명에게 청구된 301억이라는 손해배상액이다.

대체 그 엄청난 손해가 누구의 어떤 행위로 생겨난 것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없다. 사실 공장점거에서 조합원들은 누가 어떤 행위를 했는지 알 수 없다. 각자의 위치를 지키며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내가 한 짓 중 인정할 수 있는 건 점거기간 공장 안에 있었다는 것뿐이다. 

누가 했는지도 모르는 피해를 단지 공장에 남아 있다는 이유로,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천문학적인 금액에 대해 책임져야 하나. 현실적으로 원금은커녕 이자라도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2010년 공장점거파업 현장, KEC지회는 용역에 의한 폭력과 교섭해태로 일관하는 회사에 교섭을 요구하며 점거파업에 돌입했다. 이상혁 조합원(검은 비니를 쓰고 있다)도 당시  점거파업에 참여했다.

▲  2010년 공장점거파업 현장, KEC지회는 용역에 의한 폭력과 교섭해태로 일관하는 회사에 교섭을 요구하며 점거파업에 돌입했다. 이상혁 조합원(검은 비니를 쓰고 있다)도 당시 점거파업에 참여했다.

내 머릿속만 시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손배청구 이후 장장 7년동안 우리 공장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손해배상 대상자들은 수시로 삼삼오오 모여 회사가 청구한 301억 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이 길어지면서, 함께 이야기하던 동료들이 한 명, 두 명 청춘을 바쳐 일한 일터를 떠났다. 그렇게 떠난 동료가 수백 명이다. 

젊은 시절 청춘을 다 바쳐서 일한 회사인데, 공장 안에 끝까지 남아있었다는 이유로 우리는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천문학적인 금액을 마주했다. 더러는 흔들렸다. 회사와 회사가 고용한 용역들의 온갖 폭력에도 끝까지 공장에 남아있던 이들이 301억 원이라는 무거운 책임에 짓눌려 끝내 공장을 떠났다. 

조합원들을 흔든 것 역시 회사의 ‘불법’이었다. 재판이 길어지는 동안 회사는 301억이라는 금액을 앞세워 당사자를 계속 압박했다. 판결이 나지도 않았는데, 회사는 손배 대상자들에게 협박과 회유를 했다.

이처럼 회사가 노조활동을 막을 목적으로 노조나 조합원을 압박하는 행위는 ‘부당노동행위’로 엄연히 불법이다. 온갖 제도를 이용해서 ‘불법’을 저지르는 회사는 ‘손배가압류’를 이용해서도 ‘불법’을 저지른 거다. 

퇴사로 사람들이 줄어든다고 금액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내가 나가면 동료가 갚아야 하는 금액만 늘어난다. 조정이 결정된 지금도 퇴사를 하면 남아있는 대상자들이 금액을 갚아야 한다. 우리가 ‘손배가압류’의 목적이 손해를 갚는 게 아니라 ‘조합탈퇴 및 퇴사용’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24년 다닌 회사가 내민 ‘퇴사용 손배소장’

‘그만두면 어떨까’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머리 터지게 고민해봐도 방법은 두 가지였다.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합의를 하던지, 아니면 최선의 재판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나는 KEC에서 사회 첫 발을 내딛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취업해 지금까지 쭉 24년을 한 우물에 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일한 회사인데, 회사의 불법에 맞섰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소송을 당하고, ‘퇴사하라’고 압박을 받는다. ‘퇴사용’ 손배 앞에 흔들리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까짓 거 죽기밖에 더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티기로 결심했다.

소장을 받고 1, 2년은 하루하루 지나면서 손배가 현실이 아닌 뜬구름 같은 이야기처럼 느껴지며 무뎌졌다. 그러다 5, 6년 정도 시간이 지나니 재판 결과가 곧 선고가 될 것 같아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동안 회사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들려왔다. ‘나가니까 힘들다’, ‘돈도 못 번다’, ‘취직도 잘 안 된다’, ‘회사 괜히 떠났다, 복직할 수 있으면 다시 일하고 싶다’는 등의 이야기들을 듣다보니, 퇴사하지 않고 버틴 것에 작은 위안을 받았다.

그렇게 버틴 지 7년차인 2016년 9월, ‘3년 안에 30억을 손배 대상자들이 연대 상환하면 된다’는 법원의 조정이 이뤄졌다. 회사에서 지급되는 돈 중에 최저 생계비 150만 원을 뺀 나머지를 전부 압류해간단다. 뜬구름 같던 손배가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적어도 3년이라는 기간, 3년이면 끝을 볼 수 있는 것, 그것만이라도 최악의 상황은 모면한 것이라고, 최선의 결과라고 받아들였다. 

물론 150만 원으로 생계는 힘들다. 그렇다고 절망하고 싶지 않았다. 옳은 일을 했고, 회사의 온갖 탄압과 ‘불법’ 앞에서도 꿋꿋이 버텨냈기 때문이다. 임금 한 푼 못 받고도 버틴 세월도 떠올려보며 마음을 다 잡는다. 결혼 후 10년 육아만 했던 아내도 다시 직장에 다닌다. 그렇게 1년을 보냈고, 이제 2년만 더 버티면 된다.

 이상혁 조합원은 고등학교 3학년 때 KEC에 입사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24년동안 회사를 다녔다.

▲  이상혁 조합원은 고등학교 3학년 때 KEC에 입사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24년동안 회사를 다녔다.

곁에 있는 가족, 동료를 생각하며

나는 자녀가 3명이다. 12살 딸, 10살 아들, 6살 아들. 지회 조합원들 중에서 자녀가 제일 많다. 큰애가 5살, 둘째가 3살일 때 파업했고, 이듬해 301억원 손배 폭탄을 맞은 셈이다. 그래도 가족 때문에 걱정보다 용기를 먼저 낸다. 

미안한 것도 있다. 다른 어린이들과 같이 우리 애들도 먹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딸은 방과 후 수업과 학원, 큰 아들은 운동, 아직 어린 작은 아들은 장난감이 늘 아쉽다. 나 역시 부족하게 자란 탓에 우리 아이들만이라도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아쉽지 않게 해주고 싶은데, 다 해주지 못하고 세 번에 한 번 정도 해준다. 압류만 아니면 당연히 해줄 수 있었을 것들이다. 2년만 더 참고 이겨내면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동료들 덕에 압류 1년동안 설날, 추석, 성탄절 집에 선물을 한아름 들고 갈 수 있었다. 성탄절 선물이라며, 신년 선물이라며, 추석 선물이라며 주신 선물은 그냥 선물이 아니었다. 연휴 내내 나와 아내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웠다. 

혼자가 아니라는 관심, 내 잘못이 아니라는 응원, KEC 노조로 보내주신 연대하는 시민들의 마음들이 압류 1년을 버티게 했다.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